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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민

황당한 불어 시험 이야기

4월에 불어 시험을 보러 파리 외곽인 Malakoff를 찾았다.

Université Paris Descartes라는 대학이 시험장이라 거길 찾고 있는데 같은 곳에서 공부한 코소보 학우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부터 막혔다. 나는 내 이름과 일시 장소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왔는데 이 친구가 가져온 종이엔 오늘 날짜가 아닌 몇 주 후 날짜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헛걸음한 친구를 보내고 안에 들어가니 다른 학우들이 모여있는 걸 발견했다.

십여분을 기다리니 안내자가 나타나서 4층인가 5층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 임산부는 엘레베이터 )

미리 와서 시험장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은 시험장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마자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좁은 복도에 서서 본인 이름이 호명되면 순서대로 채워서 앉는 식이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내가 가장 마지막에 호명됐다.


시험장은 큰 교회 예배당 처럼 생겼다. 특히 의자가.

나는 제일 마지막, 그 넓은 줄에 혼자 앉았다.


시험은 생각보다 쉬웠다. 필수적인 기본 단어만 알면 통과할 수준.

듣기 평가는 내가 제일 뒷줄에 앉아서( 변명 ) 몇 문제를 제대로 못 들었는데 어짜피 통과할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쿨하게 찍었다.


시험중에 어이없게 앞에 앉은 중국 아줌마가 계속 답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뒤를 돌아 봤는데, 또 쿨하게 무시하고 시험을 봤다.

실제로 시험장엔 많은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컨닝을 시도하다가 경고를 받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왕 할거면 안걸리게 하지 왜 그렇게 보이게 시도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필기 시험은 대략 숫자 읽고 쓰기, 듣고 상황에 맞는 그림 고르기, 시간 보기, 기차표나 전기세 고지서 등을 보여주며 이게 무엇을 뜻하는 문서인지 맞히기 등등 이었다.


시험장은 이런식으로 생겼다.



다음은 말하기 평가인데 대부분의 시험자들이 긴장하는 부분인듯 했다.

말하는 것 까지는 어떻게 하겠는데 질문자가 질문을 할 때 못 알아들을까봐 그게 제일 걱정인듯 했다.


여기서 부턴 사람마다 다른데 필기 시험을 보고 몇시간 후에 바로 말하기를 보던가 아니면 다음날 보는 일정으로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평가자들의 수의 비해 시험보는 사람들이 월등히 많아서 그랬나 보다.

점심을 먹고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이나 때우고 있는데 옆에 중국 아줌마 두 명이 앉았다. 그러더니 나한테 시험 보러 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냐 어디서 사냐 등등 묻더라. 한참 호구 조사를 당하고 있던 와중에 옆에 앉은 다른 중국 아줌마가 통화를 한참 하더니

'이번 말하기 평가는 xx에 대해 물어보고 xx도 물어보고 xx도 나오고 어쩌구 저쩌구...'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도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데 ( Châtelet였던 걸로 기억 ) 거기 있는 중국 친구가 몇 시간 먼저 시험을 보게 돼서 알려줬다고 한다.

문제는 그 사람이 알려준 내용이 너무 뻔하다는 것이다.

본인 소개나, 사진을 보며 설명 등등 불어 교육 시간에 이미 모의 형식으로 풀었던 것들이다.


여튼 나는 시험 시간이 되어 그 아줌마들과 헤어지고 다시 시험장으로 돌아왔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말하기 시험을 보는 첫 번째 조였다.

다들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근거 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나도 긴장되기 시작했다.

문이 초조하게 생겼다.

그러던 중 평가자 한 명이 나오고 이름을 호명했다.

첫 번째 호명자는 나였다.


필기&듣기는 제일 마지막에 호명돼서 혼자 제일 뒤에서 보고, 말하기는 제일 먼저 보다니 불리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맞아. 내 인생은 항상 재수가 없었지. 잠깐 어쩌다 실수로 돌아왔던 재수가 다시 가출한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들어갔던 것 같다.

평가자들은 네 명. 남자 1 명, 여자 3 명인데 개인적으로 여자 평가자가 걸리길 원했다. 남자 보다 톤이 높아서 상대적으로 잘 들리기 때문이다.

확률상으로도 75%인데 남자 평가자가 걸렸다 ( ... )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 물어봤던건 본인 이름을 말하고 ( 철자까지 ) 자기 소개랑 여기서 뭘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등등을 물어봤다.


그 다음은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하고 평가자는 한 두개의 추가 질문을 더 했다.

예제로 쓰인 그림이나 사진은 종류가 많았고 랜덤으로 결정하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는 대화 형식의 문제인데, 내가 어떤 매장의 점원 또는 손님이 돼서 평가자와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다. 뭘 사고 팔고 하는 형식이다.

긴장했던 것에 비해서 문제는 간단했다.

시험이 끝나고 복도로 나가니 기다리던 시험자들이 우르르 나에게 문제가 어땠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4 - 5 주 정도 후에 결과가 나왔다.

결과도 온라인으로 받는게 아니라 직접 가서 받아야한다고 했다.

회사 때문에 와이프가 대신 갔는데 결과를 보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이프 : 축하해 합격했대.


나 : 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니까 문제가 쉬웠어.


와이프 : 근데 너 북한 사람으로 합격했어.


나 : 뭐?


와이프  : 니 북한 사람으로 등록됐다고.


나 : 헐...


그렇다 나는 북한 사람으로 시험에 응시해 통과한 것이다.

첫 번째 필기 시험에 앉은 자리에 내 이름과 출신 국가가 적힌 종이가 있었는데 'Corée', 'République' 이딴 것들만 보고 당연히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République de Corée ( 한국 )

République démocratique populaire de Corée ( 북한 )


10 유로를 내면 바꿔준다는 얘길 듣고 이미 와이프가 지불 했단다.


여튼 기묘하고 시험운도 드럽게 없는 내가 어찌어찌 이민자가 반드시 패스해야하는 것들 중 하나인 불어 시험을 통과했다.